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문단 편집) === 진행된 노력 === 사건 당시부터 계속 미군정에 의한 조작이라는 증언이 있었으나 민주화 이전에는 이러한 주장은 탄압받았다. 피고인의 유족은 '[[빨갱이]]'에 더해 '파렴치한 위폐범'의 가족이라는 [[연좌제]]에 시달렸다. >학살 당한 것은 이관술만이 아니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총성에 사라졌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 여름이었다. 경남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10년 전인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된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해서다. > >울산지구 CIC와 울산경찰서 경찰들은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최소 870명을 위 두 곳에서 학살했다. 유가족들은 4.19 후인 1960년 여름 두 곳에서 상당수의 유해를 발굴했다. 가마니 위에 부위별 유해와 보도연맹원들을 묶었던 철사 줄이 대량 발굴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태화국민학교로 간 박경희(이관술 외손녀)는 발굴된 유해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 이정환(이관술 딸) 역시 목 놓아 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 >어차피 어떤 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태화국민학교에서 위령제를 치른 후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약 30명의 유족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봉분을 세운 지 1년도 채 안 되어 묘가 파헤쳐졌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동토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울산경찰서는 비석을 깨부수고 유족들을 호출했다. > >"빨갱이들이 묘를 만들었으니, 네놈들이 묘를 파헤쳐"라고 했다. 유가족들에게 파묘를 지시한 것이다. 인륜에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조치였다. 더군다나 경찰들은 파헤친 묘에서 나온 유해를 유족들에게 화장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 >경남북지역과 제주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파묘를 시키고, 유해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한 곳은 울산이 유일하다. 박경희의 부친 박동철은 이관술의 큰 사위다. 또한 울산에서 학살된 이중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학술도 포함되었다 >---- >박만순, [[http://omn.kr/1rpnm|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파렴치한 위조지폐 범으로 처형된 이의 후손들의 삶은 신산했다. 이관술의 남동생과 사위도 개전 직후 끌려가 총살되었고, 두 명이던 아내와 네 딸도 전쟁 중 행불되었다. 마산으로 시집 가 있던 큰딸과 고향 울산 집을 지키던 막내딸만 생존했는데, 누구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 >우연히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출판사에 문의해 나를 찾아온 이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딸 이경환 씨와 그 자손들이었다. ‘광복20년’이니 하는 옛 방송극에 사악한 빨갱이 범죄자로만 등장하던 이관술을 좋게 그려준 데 대한 감사로, 멀리 경상도에서 올라온 것이다. >---- >안재성[[https://dongosong.net/archives/2050|#]] >영하의 모진 바람이 불어대는 부평역 광장에 때 아닌 울음바다가 행인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경환(이관술 딸) 할머니와 이관술의 두 외손녀 손옥희 씨와 박경희 씨 또 이들을 태우고 온 손녀사위들까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단지 이관술을 그린 작가, 그의 생애의 일부분이나마 긍정적으로 복원한 작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통곡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한이 깊은지 짐작 못했던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한 맺힌 삶을 살아왔는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통한의 눈물바다는 이효정 할머니 댁으로 자리를 옮겨 또 한번 재현되었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하자, 이경환([[이관술]] 딸)은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상 조사를 신청했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이관술의 가족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관술은 이미 처형당했지만 명예만이라도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그 후 역사는 그를 파렴치한 위조 지폐범으로 기록한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 >자전거를 타고 짐칸의 폐품과 솥단지 밑에 소작쟁의 소식이 담긴 기관지를 남으로는 마산에서 북으로는 함흥까지 페달을 밟으며 날랐던 이관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 한 가닥 지을 줄 알았던 그에게 역사는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 >박현주,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62297|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시기에는 이미 최초로 한국현대사를 다룬 한국 박사 학위 논문을 쓴 것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서중석]]이 "위폐를 찍어 사회 혼란을 조장하려 했다는 부분은 설득력이 없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 당황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매우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미소공위 휴회 후의 제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라며 1991년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에서 유효한 증거가 없었고 피고인뿐만 아니라 증인까지 고문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음을 지적한 바 있었다. 또 [[정용욱]], 김무용 등 역사학계 최고 권위자들은 조작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군정의 "정치적 의도", "미군정의 정면공격" 등으로 수십 년 전부터 사실상 조작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해 왔다. 역사학자 신주백은 정판사 사건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분석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0940|신주백, 송언필]] 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훗날에 발결된 미국무성 자료까지 아무리 검토해 봐도 철저한 조작, 누명"이라는 결론을 내린 [[평전]] 작가 [[안재성(작가)|안재성]]이 2006년 <이관술 1902-1950>을 출판한 바 있었다. 2008년 고지훈은 정판사 사건에 대한 최초의 학술지 논문인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 석명(釋明): 사실을 설명하여 내용을 밝힘. 어떤 일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나 견해 또는 방침 따위를 공개적으로 발표함 또는 그 입장이나 견해를 뜻하는 성명(聲明)이 아니다.]를 발표했다. 고지훈의 정판사 사건 글은 정용욱이 엮은 "서울대학교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의 약 10년에 걸친 집합적 연구의 결실"이라는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이라는 책에서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신청 사건은 조사되지 않았다. 각하나 진실규명불능 통보를 해 준 것이 아니라 아무 통보도 없이 조사하지 않은 것이다.[[http://omn.kr/1stey|#]] 최종 조사 결과 보고서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이관술에 대한 학살은 조사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응교가알려준이관술학살일.jpg|width=100%]]}}}||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2010년 보고서> 5권, 손응교가 알려준 이관술 학살 날짜 || 이관술 유족은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국가배상 판결로 이관술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정받으며 약간의 명예회복을 했다. 2012년 역사학자 김기협[* 전 계명대 사학과 교수. 현재는 은퇴한 원로 역사학자.]은 미군정기 위폐 실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산당 핵심간부 몇 사람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전쟁 발발 때 학살당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1984483|#]]라고 분석했다. 2015년 임성욱이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임성욱의 논문은 70년만에 나온 박사학위 논문인 데다 당대의 모든 신문기사를 비롯한 그때까지 이용되지 않은 새로운 사료에 기반한 연구였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총괄했던 임영태에 의하면 "임성욱이 사실상 이 사건이 미군정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작사건임을 드러내었다. 연구 결과 등을 놓고 볼 때 이 사건은 조작해낸 사건이었다는 점이 확실하다." 정치학의 권위자인 신복룡 교수는 2015년 [[주간조선]]에 "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출처: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주간조선』, 2365호, 2015.7.13.]고 썼는데 그 뒤 2023년 6월 21일 학술대회에서 남한의 군정이 토착 공산주의자를 혹독하게 탄압한 사례로 조선정판사 사건을 들었다.[[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4956|#]]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에 따르면 "조선정판사 사건은 100% 조작"이다. 사회주의사 연구의 권위자인 역사학자 [[임경석]]은 김용암 변호사에 대해 연구하며 "그의 변론은 검찰의 유죄 소견 근거를 완전히 뒤엎었다.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판사 사건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론의 대가는 컸다. 공산당의 위신을 추락시키려는 음모에 앞장서 맞선 까닭에 그는 합법적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미군정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6년 12월부터 지하생활로 숨어들었다."고 분석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2349.html|냉전시대 명변론의 대가는 처절했네 - ‘위조지폐 사건’ 검찰의 유죄 소견을 뒤엎은 김용암 변호사, 변론 이후 합법적 생활 포기하고 러시아행]] 국가기관과 별개로 임성욱의 조작 입증 이후 언론계와 시민사회에서는 피고인에 대한 명예회복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관술은 1950년 대전형무소 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인했으며, 사법부 역시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었다. 다만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 >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다면 이관술 개인이 아닌 '조선정판사 사건' 진실규명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15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에 전심전력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5년간의 옥살이와 8년간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이 울산과 경주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 >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통곡이 터졌다. 잠시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세미나 내내 울음이 그치지 못했다. 그 어느 토론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울음의 주인공은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85세)씨였다. >---- >박만순, [[http://omn.kr/1rpnm|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반병률, 최규진 등 역사학계 최고 권위자들와 박광주 교수, 이문웅 교수 등 유명 교수들이 참여한 이관술 국회세미나가 2019년 개최되었다. 학계뿐만 아니라 공중파인 MBC에서 2021년 [[광복절]]에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을 방영하며 임성욱 박사 연구를 소개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SHmUIkgOvM)]}}} ||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은 [[최태성]] 한국사 강사가 사회자였다. || 2023년 6월 《반민특위 연구》,《친일파와 반민특위, 나는 이렇게 본다》의 저자인 한국현대사 박사 이강수는 "친일파가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사용했죠. 친일 사법 기관은 독립 운동가에게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들의 수사와 기소 과정에는 고문과 조작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이 있습니다."라고 인터뷰에서 사건을 언급했다.[[https://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935147&CMPT_CD=SEARCH|#]] 이강수 박사의 인터뷰는 언론사의 2023년 6월 20일 네이버 pick으로 선정됐다.[[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396311?sid=104|#]] 언론인 중 윤태옥 PD가 [[중앙일보]]와 [[오마이뉴스]]에서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이 근래에 밝혀졌지만"이라고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92380|#]][[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26905&CMPT_CD=SEARCH|##]][* 그 중 오마이뉴스는 네이버 pick으로 선정되었다.] 파이낸셜리뷰 어기선 기자가 역사속 경제리뷰에서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90|#]] 유족의 노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관술]] 문서 참고. 이관술 유족은 필사적으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국가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대처나 [[이관술]] 미서훈 문제에서처럼 직접 사건을 공부해 보지 않으면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차별을 하고 있다. 어떻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이따위 대우를 할 수 있는지 믿기 힘든 일이다. 대한민국이 정치논리를 떠나 역사적 진실규명은 하는 [[선진국]]인 줄 알았던 사람은 사건을 공부하다 보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광복 후 폭력적인 정치활동을 한 많은 사람들이 서훈을 받았는데 얌전히 합법정당 활동만 한 정판사 사건 피고인(고문조작 사건 피해자)이 미서훈인 것과 대비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관술]]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광복 후에는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았다.[[https://n.news.naver.com/article/014/0004277317?sid=102|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이 사건은 일제의 폭압이 가장 극심했던 1930 -1940년대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전향하거나 활동을 그만둘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렴치한 위폐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긴 뒤 고문과 학살이라는 가장 잔혹한 [[국가폭력]]을 자행한 사건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관술편지.jpg|width=100%]]}}}||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이관술이 딸 성옥에게 보낸 편지[br]"성옥에게. 옥아! 나는 너의 아버지란다. 너는 나의 얼굴도 기억도 못할 것이다. 너도 지금은 육학년이라지? 퍽 컸겠구나! 내가 집을 떠날 때는 네 나이 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지 다섯 살 먹은 성옥이의 얼굴만 눈앞에 떠오른다." ||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임경석,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381.html|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